나는 학교 선생이 아니다. 대학교 시절 학습 봉사로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대상으로 대입 교육을 했었다. 제2외국인 전형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대입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고 이 친구들을 위해 서강대, 숭실대, 연세대 등 입학 성과로 일궜다. 그렇지만 이를 업으로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이란 직업을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잘한 선택인 것 같다.
미국에 있으면서 한인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었고 그 곳에서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다. 성경 지식이 짧기도 했거니와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성경 지식을 전달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했었다. 말이 험한 경우 "Language!"라고 외치고 배려없는 행동을 할 때는 엄하게 이야기했다. 컨트롤 해야 했던 학생들이 2학년부터 9학년까지 범위가 넓었고 각각 나이에 맞춰 그리고 성별에 맞춰서 엄할 땐 엄하게 친할 땐 친하게 지냈다. 예를 들어 미식 축구 공으로 캐치볼을 하다가 갑자기 공을 다른 친구한데 예고 없이 던져서 위험한 일이 발생할 때가 있었다. 이럴 때는 여지 없이 바로 혼을 내고 나중에 다치면 법적 책임이 있음을 정확히 꼬집었다. 그리고 놀이에서 배제시키고 부모님께는 이 상황을 고지했다. 단 한번도 부모님께 불만을 받아 본적이 없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그랬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정착을 하면서 집 주변 교회를 찾아갔다. 미국에서 있었던 습관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미국에서 있었던 좋은 추억이 있어서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고 처음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다. 학년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였고 교회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학생 수도 10명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 학생들의 느낌과 한국 학생들 느낌은 매우 달랐다.
먼저, 통제가 안되는 학생이 항상 2명 정도 있었다. 교회를 알아보려고 본인 자녀를 주일학교에 맡기는 경우가 종종있는데 대략 2명 정도는 아예 통제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젠가를 하다가 본인이 질 것 같으면 바로 젠가를 엎어버리는 아이도 있었고 본인이 먹던 아이스크림을 놀이기구에다가 엎어서 꽂아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고는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거나 자기가 가져온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킥보드는 건물안에서 사용을 하면 안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주일학교가 진행되는 방안까지 킥보드를 밀고 들어와서 타는 학생도 있었다. 모두 신발 벗고 앉아 있는데 본인만 신발을 신고 킥보르를 탔다.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통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하던대로 통제를 하였다. 젠가를 엎는 행동을 하면 다른 학생이 놀아주지 않을 것이라고 정확히 알려주고 규칙을 어기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명확히 알려줬다. 당연히 들을리가 없었다. 실제 주변 친구들은 이 친구와 게임하기를 거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은 "선생님, 이 친구가 너무 힘들게 해서 너무 힘들어요."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싫어하는 이야기를 하면 바로 귀를 막아버리고 방안을 돌아다니거나 탈출하였다.
처음에는 이 모습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과거에 내가 그랬던 적도 없었고 미국에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었다. 학교 선생님의 지시에 따르는 분위기 안에서 생활이 가능했었다. 일단 말도 안되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앉혀놓고 이야기를 시도했지만 앉는 것도 거부하고 누워버리거나 집에 가겠다고 교회 건물 밖을 나가기까지 하였다. 건물 밖으로 나갔을 때 사고가 나면 교회 책임일 수 있어서 나가는 것을 몸으로 막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찰과상을 입기까지 하였다. 이런 무대뽀 학생은 2명 정도 항상 있었다.
또 기억나는 친구는 모든 것에 욕으로 응수하는 초2학생이었다. 무엇을 시키든 "왜요? 내가 왜 해야되요?"였고 선생님한테건 본인 동생에게건 기본적으로 "씨발놈. 개새끼야!"가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학교 교사도 아닌 주일학교 봉사 선생님까지 쌍욕을 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부분은 정말 참을 수 없어서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대신 본인이 상대방을 괴롭히는 말투를 그대로 따라서 행동했다. 이미 이 친구는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알고 있는 듯 했고 일부러 상처를 주기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본인은 상처를 받지 않아서 그 행동을 유지하는 것 같아 보였고 본인의 행동을 본인이 직접 생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당연히 이 친구는 폭력적으로 돌변하고 주변 집기를 부시는 등 난동을 피웠다. 학교에서나 집에서 본인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었는데 주일학교에서는 본인이 원하는대로 안되는 것 같다고 판단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주부터 이 친구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비슷한 친구는 또 들어 왔다.
이런 학생이 20%정도 차지하는 것을 보고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주일학교에서 2년 넘게 있으면서 한번도 보지 못한 것을 한국에와서 한달안에 이런 사건을 겪었다. 정말 충격이었다. 선생님과 학생의 선이 없는 세상. 아이가 자기 멋대로 해도 처벌 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하는 세상. 과연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두번째, 부모님의 대응에서 충격을 받았다. 본인 자식은 당연히 귀하고 본인 자식의 말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은 인정한다. 하지만 아이들도 본인이 잘못한 것을 덮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일부 정보는 숨기고 일부 정보는 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부모님은 자식의 말만 믿거나 우리 자식은 마음의 상처를 단 하나도 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한 지도는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한 친구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거의 모든 활동을 거부했다. 율동이라든지 암송이라든지 노래부르는 것이라든지 거의 모든 것을 거부했다. 초등학교 5학년 나이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춰 가는 중이라고 판단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교회 활동에 참여해야 스티커를 주고 그 스티커로 나중에 보상을 받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다른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OO한테는 아무 것도 시키지 마세요."
"왜요?"
"어머니께서 연락와서 우리 애가 싫어하는 것은 아예 시키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나는 그 친구한테는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매주 암송을 하면 스티커를 주는 규칙이 있었는데 이친구는 암송은 거부하고 스티커는 원했다. 본인도 다른 친구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기 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왜냐하면 일정한 미션을 완료해야 주는 보상이기 때문이었다. 미션을 완료하지 않으면 보상을 해줄 수 없다는 정말 가장 상식적이고 기초적인 내용인데 이 것조차도 불만이었던 것 같았다.
결국 그 다음주에 또 나는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OO한테는 그냥 스티커 줘요."
"왜요?"
"어머니께서 달라고 하시네요. 괜히 거부했다가 피곤해지니 해달라는대로 해주세요."
"저는 줄 수 없구요. 그냥 선생님께서 OO에게 스티커 주세요. 저는 그 친구한테 보상해주는 행동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
그 친구는 다른 선생님이랑 시간을 보내고 스티커를 받는 방법으로 결정되었다.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동일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학생은 습득을 한 것이다. 과거에도 어머니의 도움을 얻으면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정리하면 어머니의 방침은 우리 아이가 싫어하는 것은 아예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당장 내 삶을 봐도 싫어하고 하기 싫은 것을 해야한다. 그런데 매번 이런 것을 회피하거나 피한다면 과연 나중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것인데 부모님이 그 기회조차 잘라내는 느낌이 들었다.
10명 중 8명은 평범한 학생들이다. 물론 부모님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불이익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시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보았을 때 8명은 보통 학생으로 보였다. 하지만, 문제 학생 1명 또는 2명이 모든 반 분위기를 망친다. 문제 아이가 선생님께 욕을 하고 대들면 다른 학생들은 그렇게 행동을 해도 괜찮다고 받아들인다. 그래서 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문제 학생은 주변 학생을 괴롭게 한다. 실제 보면 ADHD경계선에 있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고 주변 학생과 아예 어울리기 힘든 성격인 학생도 보인다. 대개 본인 뜻대로 게임을 못하거나 게임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 분을 참지 못하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주변 사람을 때리고 괴롭힌다. 그리고 자기보다 게임 못하는 학생이나 선생이 있다면 욕을 하면서 모욕을 준다. "이것 밖에 못하쥬? 병신이쥬? 나한테 아무것도 못하죠? 나한테 뭐라고 하면 아동학대쥬?" 이런 말을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학생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사건을 부모님께 이야기할 것을 건의 드렸는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께서 절대로 하지 말라고 조언을 하셨다. 학부모는 그 말을 듣지도 않고 오히려 기분만 나뻐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조언을 해주신 선생님은 초등학교에서 정년 전 퇴직하신 교사 선생님이셨다. 학교 현장은 정말 개판일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세번째, 중고등학생은 법을 악용할 줄 안다. 초등학교 때 교실 통제가 안되는 상황을 본 학생들이 많다. 규칙을 지키지 않더라도 본인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학생들도 많은 것 같다. 심지어 본인에게 유리한 법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었다.
초등부 교사로 있는지 1년이 지났을 때 일이었다. 목사님께서 따로 전화 주셔서 중고등부 교사로 이동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유가 어떻게 되었건 중고등부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첫날 분위기는 좀 더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명의 중고등학생이 모여 있는데 일단 선생님을 보거나 교역자를 봐도 인사자체를 하지 않았다. 첫주, 둘째주가 지나가도 여전히 인사를 하지 않는다. 사실 인사를 잘만 해도 주변 어르신한테 이쁨도 받고 나중에 회사에 가거나 사업을 하더라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것을 아예 하지 않았다.
또래 집단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되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이 지나갈 즘에 더이상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인사를 하는 것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어차피 이야기를 해도 내가 그 학생들에게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 학생들도 알고 있었다.
새 학기가 되어서 성경 암송을 새로 시작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암송을 하기로 발표하고 암송 구절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강제로 외우게 하는 것은 아동 학대예요!"
순간 나는 벙 쪘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너가 생각하는 아동학대 정의가 뭐니?"
"...."
아무 답변이 없었다.
"그러면 너가 기분나쁘면 모든 것이 아동학대가 되는 거니?"
당시 분위기는 얼어 붙었다. 물론 그 학생이 암송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날 충격은 잊을 수 없었다. 초등학생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생각을 할 수 있는 중고등학생이 "아동학대"라는 단어를 쓰고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날 이후 내가 알고 있는 중고등학생은 성인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촉법 기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주변에 이런 일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친구 중에 "아동학대처벌법"이라는 제도를 이용할 줄 알고 실제 이익을 본 경험이 있었겠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 그 학생 부모님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으로 담아 두었다.
네번째, 즉각적인 보상과 기쁨을 추구하는 심리가 강한 것 같다. 다른 말로는 본인이 싫어하거나 힘든 것을 돌파하려는 의지가 많이 적은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있다. 이미 남자친구를 5번 이상 사귀었고 현재는 6번째 남자친구와 연애중이다. 본인 입으로 남자친구를 하도 많이 사귀어서 이제는 감흥도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친구가 자주하는 말은 "자퇴하고 싶어요. 왜 공부해요? 좋은 대학 나오면 뭐해요? 어차피 취업도 못하는데."이다.
내가 "학교 어떻게 지냈어?" 라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자퇴하고 싶어요. 공부 왜하는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벌점 맞아도 저랑 상관 없어요."이다. 물론 이 대답을 할 때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본인의 핸드폰에 나오는 틱톡 영상을 보고 있다.
1년 동안 관찰을 해 본 결과 10명 학생들의 대부분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있다.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틱톡, 유튜브 영상에 거의 매여 살고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재밌는 영상인지 재미없는 영상인지 파악하는데 단 2초면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딱 2초만 보고 재밌는지 아닌지 파악한후 바로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재밌는 영상을 보더라도 1분을 넘어가지 않는다. 1분이란 시간동안에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겠지만 그 후 집중력은 알 수 없다.
설교가 끝나면 학생들과 질의 문답을 하면서 설교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물어보는 시간을 따로 가졌었다. 10명 중에 3명 정도는 설교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학생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본문을 읽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설교에서 등장한 단어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신앙생활을 한 것도 나이가 들고 시작을 했었고 가정 교육과 학교 생활을 통해 기본 도덕을 배웠었다. 남의 말에 귀를기울여야 한다는 점도 그냥 살면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현재 주일학교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것 조차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 주일학교가 이정도라면 과연 일반 학교는 어떨지 안봐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한국에서 주일학교는 그만두게 되었다. 정확히는 더 했다가는 "아동학대로 신고 받을 것 같은 위협"을 느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있었고 이 친구는 모든 질의 문답을 거절한 친구였다. 예배 마치고 같이 구호를 외치는 시간이 있는데 이 친구만 유독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친구가 구호를 외칠 때까지 6번 같이 반복해서 구호를 외치도록 했다. 다른 학생들이 짜증날 정도로 같이 외치도록 유도를 했지만 그 친구는 화를 내면서 그냥 방 밖을 나가버렸다. 이 때 매우 싸한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더 주일학교를 하다가 "아동학대 신고"로 경찰서에 왔다갔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 목회자에게 더이상 주일학교를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그만 두었다.
나는 궁극적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주일학교는 무엇을 하는 공간인가?" 단순히 성경 지식을 알려주는 공간인가? 아니면 사회적 규칙을 알려주는 공간인가? 내가 한국에 와서 경험한 1년간 주일학교 모습은 성경 지식도 그렇다고 사회적 규칙도 알려줄 수 없는 곳이었다. 주일학교가 이 모양인데 과연 일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습은 어떨지 생각하면 아찔했다.
사실 교회도 안 다닐까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들어 신앙생활을 한 것이고 한인 교회에서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해야하는 도리가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미국 한인 교회에서 좋은 추억을 안고 한국에 와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공립학교 선생님과 같은 투철한 사명 의식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나는 원래 선생님이 아니니깐.
주일학교를 통해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은 본인의 기분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학교에서 지도하는 어떤 규칙도 본인은 안지키고도 편안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본인 자식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말라는 조치를 요청할 수 있어 보였다. 하나의 작은 사회인 학교에서 규율을 지키고 협력하고 권위를 따르는 과정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학생과 학부모를 마주하는 선생님, 그리고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는 학생들이 피해를 보았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학생이 난리를 칠 때 마다 옆에서 한심하게 처다보는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 떠오른다. 이미 표정에는 해탈한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선생님, 학교가면 저런애들 많아요. 그냥 그려러니 해요." 이 친구는 이미 교육 붕괴에 대해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국회의원들, 교육감, 정치인들, 정신과 의사들 등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있다. 그런데 내 느낌엔 단 한번도 교육 현장에서 학생을 상대해보고 학부모를 상대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학생들이 이미 사회에 진출을 했다는 점이다. 군대도 병사가 간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규율을 지키는 것을 연습하지 않고 군대를 갔으니 당연히 그런 일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친구들이 사회에 나오면 적응을 잘 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을 텐데 이미 뉴스에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젠 그 모습이 굉장히 흔하고 자주 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기초교육인 초등학교부터 학생과 학부모가 사회의 기본 규칙을 깨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과연 사회에서 요구하는 규칙과 도덕은 지킬 수 있을까?
사람의 행동을 통제하는 요인은 1)양심, 2)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도덕, 3)국가에서 만든 법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고대 국가를 보면 법이 복잡하거나 다양하지 않았다. 고대 사회는 양심과 사회적으로 합의한 도덕으로도 통치가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현상을 보면 일단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도덕 자체가 무너진 것 같다. 사람의 양심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기 어렵지만 사람의 양심이 모여서 도덕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미 양심도 무너져 내리지 않았는가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남은 것은 오로지 "법"밖에 없는 것 같다. 더이상 선생, 학생, 학부모, 지도자를 건들면 안되는 "선"을 넘어서는 것을 보면서 과연 "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긴하다. 사회마다 시대마다 "선"은 분명히 달라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선"은 있다고 생각한다.
자녀가 부모를 때리거나 죽인다고 할 때, 과거나 현재에도 이 행동을 격려하거나 잘했다고 하는 경우는 아직 없다. 이 정도 "선"은 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선생님한테 욕을 하고 모욕을 주고 협박을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괜찮은 행동"으로 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우리아이가 장애아이라서 그래요'. 또는 '우리 아이가 너무 화를 참지 못해서 그래요.' 또는 '선생님이면 그 정도는 받아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 "선"은 이미 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결국 '법'을 통해 그 선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치인들, 교육 정책 담당자, 교육감 등 사회 지도층은 이 상황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미국은 정말 할 것 없으면 공립 교사를 지원한다. 처우도 좋지 않고 교육 환경도 거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 집행은 확실하기 때문에 학생이 교칙을 어기면 2시간 넘게 걸리는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아니면 퇴학처리가 된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명확히 알려준다. 그래서 소위 문제있는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서 쫓겨나고 없는 경우가 많다. "법"으로 처리하는 부분이 필요하다면 "법"으로 처리하는 것이 현재 시대에는 맞지 않을까 싶다.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보고 있자니 집에서 편안하게 TV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1달에 한번 정도 주말에 쉴 수 있었지만 집에 있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한사람이라도 자리를 채워서 얼마나 우리나라 상황이 심각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이 글이 누구한테 읽힐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시는 분들에게는 우리나라 교육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이미 희망이 없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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